항목 ID | GC08500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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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驛院 |
영어공식명칭 | Yeokw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병훈 |
[정의]
조선 시대 영덕 지역에서 운영되었던 역과 원.
[개설]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을 구성했던 조선 시대 영덕현(盈德縣)과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에는 관리들을 위한 교통 및 숙박 시설로서 역(驛)과 원(院)이 설치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영덕현과 영해도호부에 4개의 역과 17개의 원이 있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 원은 2개로 줄어들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역제(驛制)는 중앙 정부와 지방 군현 간의 문서 전달, 관리 접대, 조세의 운송과 변경(邊境)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군사정보를 신속히 전달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관리들과 상인 및 사적인 여행자의 편의를 위하여 원(院)과 관(館)을 설치하였다. 원은 대체로 역로(驛路)를 따라 설치되었다.
[관련 기록]
조선 시대 영덕현·영해도호부 지역의 역원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 『영남읍지(嶺南邑誌)』[1871]의 역원조와 『영남역지(嶺南驛誌)』(1895)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내용]
역의 경우 조선 전기 영덕현에는 남역(南驛)과 주등(酒登)의 오포역(烏浦驛)이 있었으며, 영해도호부에는 병곡역(柄谷驛)과 석보(石保)의 신역(新驛)이 있었다. 이는 조선 후기 남역과 주등역, 병곡역과 영양역(寧陽驛)으로 이어졌는데,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영덕현에는 주등역만 남게 되었다. 이들 4개 역에는 각종 말과 이를 관리할 역리와 노비가 배정되어 있었다. 이에 조선 후기 영덕현의 주등역은 중등마 2필, 짐말[卜馬] 8필, 역리 89구, 노(奴) 76구, 비(婢) 95구, 남역은 대마(大馬) 1필, 중등마 2필, 짐말 8필, 역리 187구, 노 16구, 비 12구가 배치되었다. 영해도호부의 병곡역은 대마 1필, 중마 2필, 짐말 3필, 역리 11구, 노 16구, 비 5구, 영양역은 중마 2필, 짐말 5필, 역리 5구, 노 3구, 비 2구가 각각 설치되었다.
원의 경우 조선 전기 영덕현에는 북원(北院)·주양원(酒養院)·남역원(南驛院)·두아화원(豆牙禾院)·신원(新院)·지품원(知品院)·분증사동원(奮增沙冬院)이 있었고, 영해도호부에는 면현원(眠峴院)·제인원(濟仁院)·위장원(葦長院)·적혈원(赤穴院)·광제원(廣濟院)·천상원(川上院)·덕봉원(德奉院)·정족원(鼎足院)·창수원(蒼水院)·환희원(歡喜院)이 있었다. 그러나 원은 점차 기능이 약화되면서 임진왜란 이후 대부분 사라졌다. 대신 주막이 설치되어 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영덕현·영해도호부의 원 가운데 광제원·창수원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지명만 전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덕현과 영해도호부에 설치된 역과 원은 '경주-안강-신광-서정리-청하-송라-지경-남역[남정]-오포-영덕'을 잇는 전통 시대 교통로의 존재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