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제의 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329
한자 李弼濟-亂
영어공식명칭 Lee Pikje's Rebellion
이칭/별칭 영해농민의 난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71년 3월 10일연표보기 - 이필제 영해에서 거병
종결 시기/일시 1871년 3월 16일연표보기 - 이필제 영해 퇴각
발단 시기/일시 1871년 3월 10일 - 이필제 영해 관아 점령
전개 시기/일시 1871년 3월 15일 - 관군 출동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1년 3월 16일 - 이필제 단양 피신
발생|시작 장소 이필제의 난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지도보기
종결 장소 이필제의 난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지도보기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이필제|최시형

[정의]

1871년 동학교도 이필제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서 동학교도를 규합하여 봉기한 사건.

[개설]

이필제(李弼濟)의 난은 1871년 3월 10일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과 함께 경상도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일대]에서 일으킨 사건이다. 1863년(철종 14) 동학에 입교한 이필제는 농민을 규합해 1869년 4월 진천작변(鎭川作變), 1870년 2월 진주작변(晉州作變), 1871년 8월 조령작변(鳥嶺作變), 그리고 영해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필제의 난은 동학농민운동의 맹아로 평가받고 있으며, 일명 영해농민(寧海農民)의 난(亂)이라고 불린다.

[역사적 배경]

1864년 3월 10일 경상감영에서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처형된 가운데, 영해 지역에서는 신향과 구향의 갈등 속에서 구향이 영해의 동학접주 박하선(朴夏善)을 감영에 고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박하선은 경상감영에서 고문을 받고 여독으로 1869년 사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주작변에 실패한 이필제는 1870년 7월 영해로 잠입하여 1871년 3월까지 영해를 비롯한 경상도 일원의 동학교도 약 500여 명을 규합하였다. 또한 최시형을 설득하여 영해에서 봉기를 계획하였다.

[경과]

이필제·최시형 등은 1871년 음력 3월 10일 교조 최제우의 순교 원일(寃日)을 봉기일로 정하고, 동학의 조직망을 이용하여 경상도 일원의 동학교도 500여 명을 동원했다. 영해도호부 서면(西面) 우정동(雨井洞) 병암(屛巖)[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에 집결한 동학교도들은 저녁 7시 반 무렵 출진하여 영해부성에 이르렀고, 곧이어 영해관아를 장악하였다.

영해관아의 동헌을 불태운 동학농민군은 달아나는 영해도호부사 이정(李炡)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3월 11일 관아에 있던 공전 150냥을 털어 5개 동민들에게 나눠 주도록 하고, “자신들은 탐학한 부사의 죄를 성토하자는 것인 만큼 백성들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며, 읍민들을 안심시켰다. 이어서 이필제는 영덕관아를 공격하자고 제의하였으나 주변의 의견을 고려하여 3월 14일 최시형이 은거하고 있던 영양 일월산으로 들어갔다.

3월 15일과 16일 사이 영덕현령 정중우(鄭仲愚)가 영해부의 병력을 이끌고 출동하였고, 나아가 연일·장기·청하 세 고을의 현감, 안동·경주에서 병력이 출동하였다. 관군은 최시형이 은거하고 있던 일월산을 공략하여 동학교도들을 체포하고 그 근거지를 없앴다. 이에 이필제·최시형 등이 단양 정기현의 집으로 피신함으로써 영해 지역에 일어난 이필제의 난은 일단락되었다.

[결과]

단양으로 피신한 이필제 등은 영해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재차 거사를 도모하게 된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불만을 품고 있던 유림을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기로 하고, 정기현·김낙균·최응규를 비롯해 풍기의 권응일, 연풍의 정해청, 충주의 송회철, 상주의 김공선 등과 함께 8월 2일 거사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거사 당일 집결 장소로 정해진 조령 주막에 예정된 인원이 모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관군이 들이닥치면서 정기현이 체포되었고, 이튿날 이필제도 체포되었다. 의금부로 압송된 이필제는 그해 12월 24일 ‘모반대역부도죄’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필제의 난은 최초의 교조신원운동이었고, 도탄에 빠진 백성과 외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자는 반제·반봉건 투쟁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민란과는 성격을 달리하여 동학 조직망을 이용한 연합적이고 조직적인 성격을 가진 농민 항쟁이었다. 그러므로 1894년 농민 봉기의 맹아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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