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6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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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敦復 |
영어공식명칭 | Park Donbok |
이칭/별칭 | 무회(无悔),창주(滄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채광수 |
출생 시기/일시 | 1584년 - 박돈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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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06년 - 박돈복 생원시 입격 |
활동 시기/일시 | 1624년 - 박돈복 증광시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24년 - 박돈복 성균관학유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25년 - 박돈복 성균관학록, 승문저작, 사록겸학정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32년 - 박돈복 병조좌랑, 전라도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32년 - 박돈복 진주판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37년 - 박돈복 형조정랑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38년 - 박돈복 사헌부장령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41년 - 박돈복 호군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42년 - 박돈복 사간원정언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43년 - 박돈복 사헌부장령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44년 - 박돈복 김해부사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47년 - 박돈복 사망 |
출생지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
부임|활동지 | 진주목 - 경상남도 진주시 |
부임|활동지 | 김해부 - 경상남도 김해시 |
사당|배향지 | 위정동용두산재사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무안 |
대표 관직 | 김해부사 |
[정의]
조선 후기 영덕 출신의 문신.
[개설]
박돈복(朴敦復)[1584~1647]은 문과 급제 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김해부사(金海府使) 등의 관직을 지냈다.
[가계]
박돈복의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무회(无悔), 호는 창주(滄洲)이다. 아버지는 첨정(僉正) 박응발(朴應發)이며, 어머니는 재령이씨 증(贈) 좌승지 이은보(李殷輔)의 딸이다. 1584년(선조 17) 경상도 영해도호부 인량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은 한양조씨 조연(趙涓)의 딸이다.
[활동 사항]
박돈복은 1606년(선조 39)에 생원시에 입격했으나 광해군 정권기에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반정 다음 해인 1624년(인조 2) 증광시 병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1626년(인조 4) 모친상으로 잠시 낙향을 하였다가 1632년 병조좌랑·전라도사·진주판관 등의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진주판관 시절에는 감사에게 민폐 14조를 진계(陳啟)하여 백성들을 위해서 폐단을 개혁하였다. 1635년 벼슬에서 물러나 영해로 내려왔으나 병자호란 소식을 접하고 의병 활동을 벌였다. 1637년 형조정랑으로 정계에 복귀하였으며, 청나라의 군사 지원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호군(護軍)·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김해부사를 지냈고, 장령에 재임할 당시에 탄핵을 받아 21년간의 벼슬살이에서 물러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1647년 4월 1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어려서 외숙부 이함(李涵)에게 학문을 배웠다. 29세 때인 1612년 의성현령에 재임하던 장현광, 1620년에는 영해에 유배 온 김시양(金時讓)을 찾아가 공부를 보다 성숙시켰다. 박돈복은 임금이 백성을 통치함에 있어 필독서로 『대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경학과 예학 분야에도 조예가 깊었다. 문집으로 『창주문집(滄洲集)』 3권이 전한다.
[묘소]
박돈복의 묘지명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지었고, 『단양부지(丹陽府誌)』에 "부의 서쪽 25리에 부인의 묘가 같은 언덕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