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7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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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致道 |
영어공식명칭 | Park Chido |
이칭/별칭 | 박성호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영배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박치도(朴致道)[1884?~1926]는 경상북도 영덕군 출신으로, 본관은 무안(務安), 이명은 박성호(朴成浩·朴星浩)이다.
[활동 사항]
박치도는 전기의병 시기 영해의진의 중영의포(中營義砲)에서 활동하였다. 영해의진은 1896년 2월 11일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 이수악(李壽岳)을 대장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병사들의 편재를 보여주는 자료가 의포도안(義砲都案)인데, 포(砲)별로 의포(義砲)·중영의포·포무영의포(砲武營義砲) 등이 있었다. 박치도는 중영의포에 속하여 활동하였다. 중영의포는 기통(旗統) 아래 5대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각 대는 10명 혹은 11명으로 구성되었다. 영해의진은 1896년 8월 14일 영덕군 병곡(柄谷) 사천(砂川)에서 적의 습격을 받아 크게 패하면서 해산하였다. 1910년 나라를 잃자 많은 인사들이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영덕군 축산면(丑山面) 도곡리(陶谷里)에 거주하는 무안박씨(務安朴氏) 가문의 종손인 박경종(朴慶種)도 망명길에 올랐다. 박치도 역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13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박치도는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안도현(安圖縣) 내도산(內島山)에 들어가 대한제국 군인 및 의병들과 함께 대한정의단 임시군정부(臨時軍政府)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9월에는 동료 조동식(曺東植)·최재용(崔載容)·엄홍구(嚴弘龜) 등과 함께 군자금과 식량 등을 모집하였다. 10월 23일 대한정의단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권고로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로 이름을 바꾸는 데 동조하고, 대한정의군정사의 초모과장(招募課長)으로서 독립군 모집 활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대한정의군정사는 다른 무장독립운동 단체들과 연합하여 함경도 삼수(三水)·갑산(甲山)·무산(務山) 지방으로 진공작전을 펼쳐 일제 지배 기구인 헌병대·경찰관서·관공서 등을 습격하였다. 또한 박치도는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박동일(朴東一)·계성춘(桂成春) 등 10여 명을 남경군관학교(南京軍官學校)에 파견하였다. 또한 응원단(應援團)을 조직하여 무기를 구입하여 군정서(軍政署)로 보내는 동시에 헌병대장에 취임하였다.
1923년 박세진(朴世鎭)·류기동(柳基東)·김만수(金萬秀) 등과 함께 북만주(北滿州) 취원창(聚源昶)으로 활동지를 옮겼다. 1924년 4월 6일 류기동·김만수 등과 하얼빈 총영사관 순사부장 구니요시[國吉精保]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1926년 취원창에서 자결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