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7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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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石存 |
영어공식명칭 | Shin Seokjon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83년 - 신석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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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 11월 - 신석존 정환직의진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11월 - 신석존 영덕헌병대에 귀순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11월 22일 - 신석존 오두환의진에 투신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3월 31일 - 신석존 교수형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09년 5월 29일 - 신석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신석존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북면 구룡동 -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용덕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정의]
개항기 영덕 출신의 의병.
[가계]
신석존(申石存)[1883~1909]은 1909년 처형 당시 27세였던 것으로 보아 1883년 출생으로 추정된다. 출생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북면(北面) 구룡동(九龍洞)[지금의 지품면 눌곡리]이다.
[활동 사항]
신석존은 1906년 11월 정환직의진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다. 그런데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鄭鏞基)가 이끄는 산남의진(山南義陣)이 1907년 9월 2일 입암전투(立岩戰鬪)에서 패하면서 아들이 전사하자, 의병부대를 수습하여 이끌었다. 그렇기에 1909년 5월 15일자 대구공소원 판결문에서 ‘광무10년[1906] 11월’이라 한 것은 ‘1907년 11월의 오류’로 보인다.
1908년 10월 20일 영덕헌병대(盈德憲兵隊)에 일시 귀순하였으나, 1908년 11월 22일 다시 오두환의진에 투신하였다. 오두환은 정용기와 정환직이 이끄는 산남의진에서 활동한 바 있었다. 오두환은 산남의진과 영해(寧海)의 신돌석(申乭石) 부대가 서로 호응할 때 교류 종사(從事)로 내왕했던 인물이다. 그 후 영덕 지역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었는데, 신석존이 투신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09년 1월 9일 신석존은 오두환의 지휘 아래 몇 명의 동지들과 함께 영덕군 남면(南面) 상회동(上晦洞)의 이연호(李淵浩)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 모집을 시도했으나 완강히 거절하였기 때문에 군자금 모집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2월 8일 오두환 외 몇 명과 같이 화승총 3정을 가지고 영덕군 서면(西面) 산하동(山下洞)의 윤기만(尹基萬)으로부터 돈 190냥과 마포 1필을 징수하였다.
군자금을 모집한 일로 붙잡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뒤 1909년 3월 31일 대구지방재판소 형사부에서 강도 및 방화죄로 교수형을 언도 받았다. 일제의 판결에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909년 5월 15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1909년 5월 29일 대심원에서 기각되고, 형 확정으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