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809
한자 金景發
영어공식명칭 Kim Gyeongbal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4년연표보기 - 김경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김경발 창수면 3.1독립운동 참여
추모 시기/일시 2006년연표보기 - 김경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창수면 3.1독립운동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지도보기
활동지 창수경찰관주재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경발(金景發)은 1864년경 태어났으며,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동이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8일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동 시장에서 정규하(丁奎河)·박의락(朴義洛)·남효직(南孝直) 등의 주도로 영해면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3월 19일 창수면 오촌동·삼계동의 주민 수십 명을 이끌고 영양(英陽)의 이종구(李鍾龜)가 신기동에 이르렀다. 또한 다른 동리의 주민들도 영해면 3.1독립운동에 참여하고자 신기동에 모여 들었다. 이때 신리동에서는 권재형(權在衡)·이현우(李鉉祐)·박성운(朴聖雲)이 참여를 권유하였는데, 김경발도 찬동하였다. 하지만 신기동에 이르렀을 때 다른 동리의 주민과 협의하여 시간상으로는 영해로 가는 것이 어렵기에 창수동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의하였다. 김경발은 같은 동리의 권재형·이현우·박재복 등과 함께 우억만(禹億萬) 등에게 참여를 권유하니, 어느덧 신리동에서 동참하는 자가 150명에 이르렀다.

오후 4시경 약 200명의 군중들에 의해 창수면 3.1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군중들은 각자 몽둥이를 휴대하거나 태극기를 흔들며, 창수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김경발은 같은 동리의 남천순·신덕호(申德浩) 등과 주재소 건물·시설·기물을 파괴하였다.

오후 7시경 주재소 등을 파괴한 후 김경발을 비롯한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외치고 개사(改詞)한 노래를 부르며 귀가를 시작하였다. 창수교에 이르러 일경들이 소유물을 미리 숨겨둔 사실을 알고 약 30명의 군중들이 장명술(張命述)·박만복(朴萬福)의 도움을 받아 오용이(吳龍伊)·박석문(朴石文)·이강복(李康福)의 집들을 습격하여 일경들의 소유물들을 파손시켰다.

시위가 끝난 후 일경은 창수면 3.1독립운동 참여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김경발을 비롯해 신리동에 거주하는 남성의 상당수가 체포되었다. 김경발은 4월 22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대구검사국으로 송치되어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일제의 판결에 공소를 제기하여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부분 취소에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상훈과 추모]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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