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8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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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敎文 |
영어공식명칭 | Nam Gyomun |
이칭/별칭 | 명서(明書)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88년 11월 4일 - 남교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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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남교문 영해면 3.1독립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남교문 병곡면 3.1독립운동 주도 |
몰년 시기/일시 | 1974년 12월 19일 - 남교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8년 - 남교문 대통령 표창 수여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남교문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영해면 3.1독립운동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병곡면 3.1독립운동 |
출생지 |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각리리 522 |
학교|수학지 | 대제학교 -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 |
학교|수학지 | 영해보통공립학교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
활동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남교문의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명서(明書)이다. 1888년 11월 4일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각리리 522에서 남조홍(南朝洪)의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남교문은 1910년 사립 대제학교(大濟學校)[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 소재]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영해보통공립학교를 졸업하였다. 영덕 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2일 평양신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까지 갔다가 만세시위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지품면 낙평리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 김세영(金世榮)의 권유에 따라, 권태원(權泰源)·정규하(丁奎河)·권영조(權永祚)·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권상호(權相浩)·박희락(朴羲洛) 등이 계획하였다. 남교문도 곧바로 거사 소식을 들었으며, 3월 16일 영해면 원구리에 소재한 박희락의 집에서 병곡면 송천리 장로교 예배당의 조사 정규하로부터 참여 권유를 받았다. 정규하에게 태극기 1개를 받은 남교문은 마을로 돌아가 주민들에게 다시 만세시위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오후 1시경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장터에서 영해면 3.1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남교문을 비롯한 3.000여명에 이르는 군중이 시위를 벌이는 동안 영해주재소의 일본인 순사들과 충돌이 일어났다. 일경들을 제압한 시위대는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사보, 그리고 영해공립보통학교 훈도 배병렬(裵秉烈) 및 생도들에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으며, 일제의 통치기구인 영해주재소·영해공립보통학교·영해면사무소·영해우편소 등의 건물과 집기, 그리고 각종 서류를 파괴하였다.
오후 2시경 남교문 등은 병곡면 병곡리에서 일어난 병곡면 3.1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남교문은 정규하·권영조·조영한·박희락 등과 함께 400~500명의 군중을 지휘하며, 병곡주재소·병곡면사무소 등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평해(平海)에서 증원된 일본 헌병 3명과 주재소 순사가 합세하여 총을 겨누며 위협하자 정규하의 지시에 따라 오후 7시경 해산하였다.
3월 19일 만세시위운동이 지속되는 가운데 일본 군경의 무력 진압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진행된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으로 남교문도 체포되었다. 6월 5일 남교문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았다. 일제의 판결에 공소하였으나,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