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8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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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申相文 |
영어공식명칭 | Shin Sangmun |
이칭/별칭 | 여욱,단산,신상순 |
분야 |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882년 3월 20일 - 신상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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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신상문 영해면 3.1독립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58년 5월 5일 - 신상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2년 - 신상문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신상문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영해면 3.1독립운동 |
출생지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489 |
활동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신상문의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는 여욱(汝郁), 호는 단산(丹山), 이명은 상순(相淳)이다. 1882년 3월 20일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489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신상문은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19년 영덕 지역의 3.1운동은 서울에서 만세시위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지품면 낙평리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救世軍)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 병곡면 송천리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를 비롯해 남여명(南汝明)·남효직(南孝直)·권상호(權相鎬) 등 기독교 교인들에 의해 계획되었다. 김세영 등은 3월 18일 영해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영덕지역의 토착 향반(鄕班)과 농민들을 규합하였다. 신상문은 권태원·정규하 등으로부터 권유를 받고 거사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오후 1시경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에서 영해면 3.1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신상문은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군중과 행진하였다. 행진 과정에서 신상문 등은 영해주재소 주임순사 스즈키[鈴木鶴次郞]의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사보 등을 구타하였다. 또한 신상문은 군중들과 영해공립보통학교 훈도 배병렬(裵秉烈) 및 생도들에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나아가 시위 군중을 선도하여 일제의 식민통치 기구인 영해주재소·영해공립보통학교·영해면사무소·영해우편소 등의 건물과 집기, 그리고 각종 서류를 파괴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중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영해경찰서 서장 시게요시손[茂義孫]을 비롯해 순사 및 순사보 4명을 폭행하고, 본서로 돌아가는 일경들을 추격하였다.
다음 날인 3월 19일에도 신상문은 지역민 700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오후 5시경 대구 주둔 보병 80연대 소속 장교 이하 17명이 영해에 도착하였고, 일경들은 곧바로 실탄을 발포하며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어 군경은 영덕을 비롯한 영해·병곡·창수·지품·남정면 일원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인사들에 대해 대대적인 검거작전에 들어갔다. 신상문도 검거되어 소위 소요, 공무 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및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