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에 울려퍼진 3·18 독립만세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1323
한자 盈德-三一八獨立萬歲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진호

[정의]

1919년 3월 18일 민족 독립을 위해 영덕 사람들이 일으켰던 3.1운동 이야기.

[개설]

1919년 3월 18일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동 시장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병곡면, 축산면으로 확산되고, 영덕 읍내에서도 독자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영덕의 3·.1독립운동은 시작되었다.

[의병에서 3.1운동까지]

한말 일제의 침략 과정에서 일어난 갑오변란·을미사변·단발령 등 일련의 사태에 맞서고자 의병전쟁이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1896년 1월 안동권씨·영양남씨·무안박씨·대흥백씨·재령이씨 5대 가문은 의병을 조직하고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이수악(李壽岳)을 도집강(都執綱)으로 삼았다. 그리고 2월 인량리에서 이수악을 대장으로 하는 영해의진(嶺海義陣)이 결성되었다. 영해의진은 4월 축산 기암동 보기암(洑基巖)에서 영덕의진과 함께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5월 28일에는 영해에 도착한 김하락(金河洛) 의진과 합세하였다. 8월 14일에는 병곡 사천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한편, 3월 초순경에는 지품의 김건(金健)이 영덕의진을 결성하였으며, 이어 신운석(申運錫)이 의진을 이끌었다. 이들은 청송의진과 연계하여 활동하다가 김하락 의진과 함께 6월 3~4일 영덕 남천쑤[남천숲] 전투에 참가하였다. 신운석 순국 후에는 김노헌(金魯憲)이 의병을 재규합하여 보기암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전쟁은 더욱 확산되었다. 이에 영해 출신의 신돌석(申乭石)은 1906년 4월 무렵 생가인 축산면 도곡리의 주막 앞 도로에서 약 100명 의병으로 영릉의진(寧陵義陣)을 결성하였다. 영릉의진은 1908년 11월까지 2년 8개월간 영덕·울진을 비롯해 태백산맥 줄기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신돌석 의병은 일제의 전초기지인 울진과 삼척 남부의 관아(官衙)를 공격하였고, 일본군 토벌대의 공격에 항전하는 ‘반토벌전’을 전개하며 일제를 곤궁에 빠뜨렸다.

국권을 피탈한 일제는 식민지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1914년 도부군면리동(道府郡面里洞)의 관할구역, 명칭, 위치를 통폐합, 변경을 단행하였다. 이때 영덕과 영해가 합쳐졌으며, 군(郡) 소재지는 영덕으로 정해졌다. 이는 일제가 항일 의병전쟁의 중심지였던 영해의 지방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였다. 이는 곧 지역민들에게 저항 의식을 갖게 하였다. 영덕 지역의 3.1운동이 영덕이 아닌 영해에서 전개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독립만세운동의 컨트롤타워, 김세영]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3.1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고종 국장에 참례하고자 상경한 인사들과 유학생들이 3.1운동을 목도하였다. 언론 보도뿐만이 아니라 이들에 의해 3.1운동 소식이 생생하게 영덕에 전해졌다. 이에 병곡면 송천동(松川洞)의 인사들이 「조선독립경고문」 작성을 시도하는 등 영덕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를 실행에 옮긴 인사가 바로 김세영(金世榮)이었다.

김세영은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위해 상경하였다가 3.1운동을 목도하였다. 또한, 휴교령이 내려지자 3월 11일경 지품면 낙평동(洛坪洞)으로 귀가하였다. 이튿날 김세영은 마을 교회에서 권태원(權泰源)을 만나 3.1운동의 상황을 설명하고 실행을 권유하였으며, 야소교 조사 정규하(丁奎河)에게 “영덕 읍내에서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자”라는 뜻을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또한, 김혁동(金爀東)을 영덕면의 강우근(姜佑根)·김우일(金愚一), 김중명(金重命)을 지품면 원전동(院前洞) 김태을(金太乙), 황장동(黃腸洞) 주명우(朱明宇)에게 보내어 만세운동을 권유하였다. 그렇게 김세영에게 권유 받은 인사들이 영해·영덕·지품면 등지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독립! 교회와 양반이 뭉치다]

영덕 지역 3.1운동에서 주목되는 점은 교회와 유림이 앞장섰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권태원정규하의 활동이 주목된다. 3월 상순 서울에서 각지의 3.1운동을 견문하고 내려온 김세영에게 만세운동을 권유 받았던 권태원은 3월 14일 병곡면 송천동으로 가서 권헌문(權憲文)에게 계획을 전달하였다. 3월 15일에는 송천동 교회에서 정규하에게 만세운동에 진력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때 정규하가 영덕보다는 “3월 18일 영해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정규하는 묘곡동(畝谷洞)의 김원발(金源發) 등을 만나 주민들의 참가를 권유했고 태극기 제작을 부탁하였다. 밤에는 창수면 인량동(仁良洞)의 권상호(權相鎬)를 찾아가 창수·영해면 지역 양반 유림들의 참가를 권유하였다.

3월 16일 정규하는 교회 신자 90여 명에게 참가를 권유하였으며, 조영한(趙榮漢)의 집에서 박의락(朴義洛)·서삼진(徐三辰) 등과 의논한 후 면내 마을을 분담하여 참가를 권유하기로 하였다. 이에 남효직(南孝直)은 영해면, 남세혁(南世爀)은 축산면의 양반 유림에게 참가를 권유하기로 협의하였다. 3월 17일 정규하는 원황동(遠黃洞) 자택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렇게 영해를 중심으로 한 5대 성씨 양반들과 북장로파 개신교 세력 등이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해 나갔다.

[독립만세운동, 4개면에서 동시 전개]

1. 영해에서 독립만세운동

3월 18일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한 개신교 신자와 양반 유림 등 지역민들이 거사 장소로 약속한 영해 성내동시장으로 집결하였다. 또한, 장날을 맞이해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오후 1시경 정규하·박의락·남세혁 등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연설이 이어졌고 군중들도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시장 옆 영해주재소 경찰들이 해산을 강요했지만 군중들의 만세는 그치지 않았다. 군중 가운데 약 150명은 영해공립보통학교로 이동해 학생들의 참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이 거절하자, 군중들은 훈도 배병렬(裵秉烈)을 끌고 주재소로 왔다. 남세혁이 큰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이 합세하여 독립만세 열기가 거세졌다.

경찰들이 태극기를 빼앗으려고 하자, 군중들은 주재소를 공격하고 경찰들을 구타하며 제복·제모·패검(佩劍) 등을 망가뜨렸다. 이어 사무실에 진입해 기구·기물·장부·서류 등을 파손하였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경찰은 군중의 위세에 압도되어 독립만세를 외쳐야만 하였다. 한편 권영만(權寧萬)·남효직 등 300~400명은 영해면사무소로 갔다. 이를 본 면사무소 직원들은 도망쳤다. 군중들은 돌을 던져 창과 유리창을 부수고 사무실의 의자와 물품을 파손하였다.

오후 2시경 일부 군중은 다시 보통학교로 가서 교사(校舍)의 지붕과 기둥만 남기고 대부분 파괴하였다. 이어 영해공립소학교로 진입하여 건물과 물품을 파괴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영해우편소에서는 주요 서류를 정리하였지만, 군중들이 와서 깃대와 돌로 창유리를 파손하였다. 직원이 “우편소가 파괴된다면 인민에게 많은 불편을 초래할 것이다”라고 부탁해 군중들은 시장으로 돌아갔다.

시장에 다시 집합한 군중들은 만세를 외쳤다. 주도 인사들이 주재소 옆 높은 곳에서 독립 연설을 하고 군중들은 찬미가(讚美歌)를 불렀다. 그리고 다시 주재소로 가서 만세를 외친 후 돌과 몽둥이 등으로 건물과 사무실을 파괴하고, 사택(舍宅)의 가구, 의류 등을 꺼내어 파손하였다. 그리고 시장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였다.

그런 가운데 영덕경찰서에서는 보고를 받고 서장, 경찰 3명, 순사보 1명이 오후 3시 반경에 영해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영해 경찰과 함께 군중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무장을 하고 서문으로 향하였다. 그러자 군중들이 경찰들을 에워쌌다. 군중의 위세에 눌린 경찰들은 주재소로 피신하였다.

2. 축산에서 도주 경찰들을 응징하다!

경찰들이 주재소 안으로 도망치자, 군중들은 다시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남효직·남세혁·권상호·김실광(金實光)·황선의(黃善儀) 등은 몽둥이를 휘두르고 돌을 던지며 경찰들을 압박하였다. 영덕의 경찰들이 영해 경찰의 도움을 받고 두 차례에 걸쳐 탈주하였다. 이에 김실광·황선의 등 40~50명이 돌을 던지며 영덕 경찰들을 추적하였다. 주재소 동남쪽 약 400m 지점에 이르러 경찰들이 함께 군중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각자 영덕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서장과 경찰 2명은 축산면 상원동 등지에서 박익찬(朴益燦)·정점용(鄭占用)·이주득(李周得)·윤봉산(尹奉山) 등 축산 면민들과 영해에서 추적해 온 군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경찰들은 구타를 당하여 인사불성이 되거나 부상을 입었으며 무기는 탈취당하였다. 이들은 주민들의 부축을 받은 채 영해로 끌려와서 일본인 여관에 감금되었다. 그렇게 영해로 돌아온 군중들은 시장에서 다시 한번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3. 병곡으로 돌아가자,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자!

영해 성내동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군중 가운데 일부는 병곡면으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오후 2시경 정규하·박의락·서삼진 등 200여 명은 병곡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영덕면의 연평동(蓮坪洞), 병곡면의 송천동·신평동(新坪洞)·원황동·아곡동(牙谷洞)·거무역동(居無役洞)·영동(榮洞) 등지의 주민들이 합류하였다.

오후 4시경 병곡에 도착했을 때 군중들은 400~500명에 이르렀다. 먼저 정규하·박의락·김응조(金應祚) 등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군중을 이끌고 병곡주재소로 향하였다. 경찰들은 영해 경찰들의 통보를 받고 만일에 대비했으나, 군중을 제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주재소를 공격한 군중은 건물을 파괴하고 장부·문서·기구·시설물 등을 파손하였다. 순사보에게는 만세를 외치라고 요구를 했으나 거절하자 군중은 재차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결국 오후 5시경 경찰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주재소 뒤편 산으로 도주하자, 군중은 주재소를 파괴하고 병곡면사무소로 이동하였다. 면사무소에서는 면서기가 해산을 요구했으나 군중은 창유리를 깨뜨리고 사무실로 들어가 집기와 서류를 파기하였다. 이때 병곡 경찰에게 통보를 받은 평해(平海) 헌병분견소 헌병 3명과 보병 2명이 출동해 경찰들과 함께 해산을 강요하며 사격 자세를 취하였다. 이에 정규하·서삼진·남교영(南敎英) 등이 “사격을 중지하라, 오직 순사보만을 넘겨 달라”고 요구했지만 경찰들은 거절하였다. 군중이 뒤편에서 군경들을 포위하려고 움직이자, 군경들은 뒤로 물러선 채 계속 사격 자세로 위협하며 해산을 강요하였다. 정규하가 사상자 발생을 염려해 군중들을 설득하여 해산하였다. 이때가 오후 6~7시 경이었다.

4. 영덕에도 대한독립만세! 개신교 교파들 중심으로

영덕 읍내 금호동(錦湖洞)의 북장로파 조사(助師) 강우근김세영이 보낸 김혁동에게 권유를 받고 3월 16일부터 18일까지 교회에서 신자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독려하였다. 한편, 영양군(英陽郡) 석보면(石保面) 포산동(葡山洞)의 신자 이승구(李承玖)도 3월 16일 신자 박윤규(朴潤奎)에게 각지 독립운동을 듣고 3월 17일 포산동·낙평동·원전동 등의 교직자와 신자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3월 18일 강우근과 이승구와 영덕 읍내의 남석동(南石洞) 시장에서 만나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약속하였다.

오후 2시경 주도 인사들은 시장 군중 10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영덕면 금호동·상직동(上直洞), 축산면 화천동(華川洞), 남정면 남정동 등의 북장리파·남감리파·구세군 신자들도 합세하였다. 영덕경찰서 경찰들이 출동해 주동자 2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후 개신교도들의 권유를 받은 영덕공립보통학교 학생과 졸업생, 지역민 약 700명이 구금 인사들을 구출하러 경찰서로 향하였다. 하지만 경찰들이 사전에 정보를 탐지하고 영덕 읍내의 일본인 재향군인, 소방조 20여 명을 소집하고 강구(江口)에 입항한 일본인 어부 60여 명을 동원하여 경계 활동을 강화하였다. 이 때문에 구금 인사 구출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대한독립만세! 군내 각처로 확산되다]

1. 영해 성내동, 2차 만세에서 첫 사상자가 발생하다!

3월 19일 아침부터 영해면 성내동 일대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이 재개되었다. 인근 마을 주민들도 합세하여 군중은 600~700여 명에 이르렀다. 오전 11시경 포항헌병분대에서 분대장 등 7명이 영해에 도착해 영덕경찰서 서장 등 경찰 5명을 구출하고 소총 2정을 회수했지만, 군중들의 위세를 제압하지 못하였다. 오후 4~5시경 대구의 80연대 장교와 병졸 22명이 도착하였다. 이들은 헌병·경찰들과 함께 무자비하게 군중을 진압하였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2. 창수 창수동, 주재소 공격하다!

3월 19일 오후 4시경 이수각(李壽珏) 등을 비롯한 각 동의 구장과 영양군의 유지 이종구(李鍾龜) 등 약 200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창수주재소 인근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태극기를 들고 몽둥이를 휴대한 채 만세를 부르며 병곡주재소를 공격하고 건물과 집기를 파손하였다.

3. 지품, 부부 일심동체로 독립만세를 외치다!

지품면 황장동 교회 집사 주명우김세영이 보낸 김중명에게 권유를 받고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주명우는 3월 19일 정오 무렵 원전동 시장에서 ‘대한독립만만세’라고 적힌 종이 깃발을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죽기를 결심하고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연설하였다. 이에 시장 군중들도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20일 저녁 신안동의 윤석초(尹石蕉) 집 앞에서는 임순근(林順根)·문의향(文義鄕)·김형문(金亨文) 등이 ‘대한조선독립만세’라고 쓴 종이 깃발 1기를 흔들며 약 60명의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두 시간 동안 마을 일대를 활보하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3월 24일 원전동 시장에서는 부녀자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앞서 3월 19일 원전동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한 주명우의 부인 윤악이(尹岳伊)는 3월 18일 영덕 읍내 독립만세운동에서 체포된 김태을의 부인 신분금(申分今)에게 “오늘 여기 시장에서 구한국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24일 정오 무렵 원전동 시장에 나간 윤악이는 시장 군중들에게 “나는 여자이다. 하지만 한국의 독립을 희망한다. 한국만세를 부르자”고 소리치며 신분금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4. 남정 장사동, 신대한독립만세 깃발을 들고 외치다!

4월 4일 정오 무렵 남정면 장사동 시장에서 박명방(朴明方)·김석조(金石祚)·정상용(鄭尙鎔) 등이 ‘대한독립만세 신대한독립만세’ 등의 문구를 적은 구한국 종이 깃발 11기를 배부하고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시장 군중 100여 명도 호응하였다.

[3.1독립운동사상 최대 독립만세운동이었다]

3월 18일 영해·병곡·축산·영덕·창수·지품·남정면 등 7개면과 영양군 석보면 등의 30여개 마을 주민들이 개신교 교파들, 지역 양반 유림 등의 주도하로 영해, 병곡, 축산, 영덕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영해과 병곡에서 일제기관의 주재소 2개소, 면사무소 2개소, 학교 2개소, 우편소 1개소를 파괴하였다. 무력 진압하는 영덕경찰서장과 경찰 3명을 응징하고 병기 등을 탈취하며 서장 등을 20여 시간 감금하였다. 하지만 사법적 탄압으로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재판 25명, 검사국에서 불기소 처분 33명이 있었고 대구지방법원에서는 3월 19일 창수 독립만세운동과 함께 2건 170명이 재판에 회부됐다. 이 가운데 91명이 영해 등 독립만세운동 참가자로 88명이 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14,252원 손해배상청구 청구의 사소(私訴)사건이 18명에게 제기되었다. 최종 재판은 궐석 재판을 받은 남효직이 1922년 8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종료되었다. 따라서 3․1독립운동에 참가한 지역과 인원, 활동 지역과 범위, 일제에 대한 응징, 일제의 사법적 탄압 등에서 3․1독립운동사상에 최대 독립만세운동의 하나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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